Ⅱ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소록도 아이들

 

1  「병사지대<>」의 아이들

 

P 123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의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ㆍ소록도 갱생원<更生園>의 아이들」

에 대해서 보도록 한다.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이 개설된지 얼마 안 된 1917 5 31일부 『毎日申報』는 「소록도의

 

별천지 ――― 문둥병」환자를 수용하는 곳」이라는 견출로 조선총독부 의원장인 하가 에이지로우

<芳賀栄次郎>의 담화를 게재하고 있다. 그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확인된다.

     「부부환자는 없으나, 젖먹이를 기르고 있는 여성이 한 명이 있고, 처음은 그 아기를 놓도록 강력히

     명하였으나, 그 여성은 아기를 아주 기여워하고, 죽어도 놓지 않겠다고 했으나 그러는 사이에 아기

     에게도 병독이 전염된다는 가엾은 이야기도 있었다......

P 124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 개원 당시, 1917 4월부터 12월까지의 수용자수는 99, 그 가운데 사망

환자수 26명이며 그 사망률은 26.3%이나 이르고 있다. 익년인 1918년의 환자 사망률은 8.6%로 내려가

있기는 하나, 그렇다 쳐도 높은 확률이다.(1929년도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 개황』). 초대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장으로는, 육군 1등군의인 아리카와 토오루<蟻川亨>가 취임해, 지케이<慈恵>의원을

운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식민지의료와 환자에 대해 일본식 생활양식을 강요했다. 앞서 기술한 젖먹이에

대해서도, 원내에서 보육한다는 것은 바라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1929? 28, 병사한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 원장의 후임으로서, 3대 원장으로 야자와 슌이치

로우<矢澤俊一郎>가 소록도에 부임했다. 2대 원장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는 초대 원장인 아리카와

토오루<蟻川亨>가 실시한 「환자에 대한 일본식 생활양식의 강요」정책을 개혁했다. 즉 「복장은 원래

입던 한식으로 되돌리고, 중앙배급식인 식사도 각 병실마다 입맛에 맞는 것을 먹을 수 있게 했다. 가족과

통신, 면접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허용하고, 일시적 귀향도 허가했다. 신앙의 자유도 보장하고, 기독교와

불교를 자유롭게 믿을 수 있게 하고, 그들의 예배당도 교회전용임을 허용했다.(『한국나병사』대한나관리

협회, 1988).

  그런데 그 당시,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에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던 것일까? 1929년도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 개황』에 의거해, 입원환자의 연령별 조사표를 보여드리도록 한다.

 

() 현재 입원 나환자의 연령표 (쇼우와<昭和>4(1929), 12월말 조사)

 

 

연령별

5~10

11~15

16~20

21~25

26~30

31~35

 

인원수

6

23

77

154

154

119

 

 

 

 

 

 

 

 

 

36~40

41~45

46~50

51~55

56~60

61~65

66~70

총계

110

39

22

13

10

7

1

736

 

5세부터 15세까지의 소년ㆍ소녀가 29명 수용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P 125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은 교육에 대해서는 어떠한 생각으로 어떠한 시도를 추진하고 있었는가?

여기서 다시금 1929년도『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 개황』의 기술을 보도록 한다.

(원문은 가타카나, 이하 동일함.)

     「환자 가운데 다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자이므로, 이들에게 지덕함양<智德涵養>의 목적으로 환자

         중에서 학식이 있는 자를 선택해서 남북 양쪽 의원에 보통학교 교과서를 주게 하며, 차츰 글을 이해

         하는 자가 많아지는 사실은 참으로 기쁜 현상이며 현재 그 생도수 187명에 이르러 현재 환자교육별

     상황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P 28)

 

() 현재 입원 중인 나병환자의 연령표 (쇼우와4=1929 12월말 조사)

교육별

총계

교육별

총계

교육을 받지 못한 자

137

50

187

고등보통학교 학과 수준인 자

6

 

6

다소 글을 아는 자

310

93

403

동 졸업 수준인 자

3

 

3

보통학교 학과

수준인 자

88

32

120

사범학교 졸업자

1

 

1

동 졸업 수준인 자

15

 

15

총계

560

175

735

 

  환자학교 건물은, 1935년에 대해 보면 1동ㆍ99 23, 게다가 부속 가옥 1동ㆍ16 15이며, 1941년도

환자학교의 건물평수는, 119 23에 불과했다. 직원 자식들이 다니는 소록도 공립 초등학교에 비해 지극히

협소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록도 공립 초등학교에 대해선 후술키로 한다.)

  소록도지케이<慈恵>의원에서 이루어진 교육은, 학령기의 아이뿐만 아니라, 성인도 참여해 보통학교

교과서를 사용해 글을 습득하는 것을 중심적으로 다룬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교사는 환자 중 학식이 있는

자가 뽑혀 있다. 이 시기에는

P 126

「미감염 아동」(앞서 말한 듯이, 「미감염 아동」이라는 용어는 부적절한 용어이다)의 교육은 이루어져

있지 않다.

「미감염 아동」의 교육이 이루어져, 「소록도 갱생원 연보」에 기술되는 것은 『쇼우와 10(1935)

연보』(1936 10 1일 발행)부터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미감염 아동 보육소의 신축 ――― 나병환자 중에는 아직까지 나병에 감염되지 않은 자녀를 두고 있는

      자가 상당수 있으며 이들을 분리 보육하는 것은 인도적인 이유로 하는 것이지만,혹은 또 나병의 근절을

     기하는데에 있어서도 가장 필요한 것이므로 가까운 시일 내에 분리 보육을 실시해야 할 사실을 신중을

     기하여 검토해 기정의 나병 요양소 확장공사 이외에 새로이 쇼우와 10(1936)년도에 미감염 아동 보육소를

     신축키로 해 경비로서 2 4000으로 소록도 내 병사 지대와 건강지대 중간에 한 구획을 설치해

     쇼유와10(1936)5월 공사를 시작해 같은 해 8월에 공사를 마쳤다.

  더욱이 『연보』에는 「건물 ――― 미감염 아동실(1동ㆍ39 72), 미감염실(1동ㆍ57 39), 미감염

아동학교(1동ㆍ36 63)과 같은 기술이 확인된다. 또한 단층 목조건물 3동으로 된 「미감염

아동보육소」사진이 『연보』처음에 실려 있다. 환자학교에 비해, 인원이 적으면서도 건물 평수는 넓다.

지금 현재, 중앙공원 입구에 있는 소록도 「자료관」이 되어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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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 9 14일에 공포된 조선총독부 「나병」요양소 관제에 따라서, 같은 해 10 1일부터 전라남도

립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은 국립용양소가 되어, 그 명칭도 소록도 갱생원으로 개칭했다. 익년인 35

11, 수용환자 1050명를 증원해, 1기 확장 3000명 증원계획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 1935 12월말

의 수용환자는, 3733라는 다수에 이르렀다. 그 내역을 연령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에서 미루어볼 수 있듯이,

() 현재수용 (나병)환자 연령별표(쇼우와<昭和>10=1935,12월말 조사)  수용환자수 3733

연령

연령

연령

2세

  8세

14

20

12

3세

  9세

15

19

13

4세

10

2~15

97

59

5세

11

12

16~35

1650

711

6세

12

10

36~72

977

239

7세

13

19

총계

2724

1009

2세부터 15세까지의 유아동ㆍ소년소녀의 수는 남자 97, 여자 59,

156명이다. 그 가운데 「미감염 아동으로 수용 및 보육」되어 있는 자는, 1936년 소록도 갱생원

연보』(1937 8월 발행)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들 아동의 분리양육은 무엇보다도 급선무에 속하므로 유독지대 밋 건강지대 중간에 한 구획을

설치해 수용, 보육설비가 완성된 것으로 쇼유와11(1936)년도에 14세 이하 4세 이상의 아동 25

 ( 12, 13)을 수용했다」

  「감염되어 있지 않은 입원자의 자녀를 보육하기 위해 병원 사옥지대와 직원지대 중간에 지어진 보육소는

보모로부터 아이를 떼어내며 나병을 근절하는 것은 물론이며

P 128

여성을 강제노동에 동원시키기에도 유리했다.」이는 1996 4월에 국립 소록도병원이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80――― 1916~1996』에 쓰여져 있는 「미감염 아동」보육소 설립목적에 대한 내용인다.

「미감염 아동보육소」건물 앞에서 16명의 아이들이 1명의 지도원과 함께 촬영된 당시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그런데, 『쇼우와 14(1939)년 연보』(1940 8월 발행)에서는 「( 1기 공사)미감염 아동보육소의

신축」이라며 「나병환자 중에는 아직까지 나병에 감염되지 않은 자녀를 두고 있는 자가 상당수 있어

이들 환자를 수용할 시에는 미감염 아동은 그 부양자를 잃게 되므로 이를 보호 구제하는 것은 인도적

차원에서도 혹은 나병 근절을 기하는데도 가장 필요한 것이므로 가까운 장래에 이들 분리보육을 실시해야 할

것을 실감해 기정 나병 요양소 신영설비계회 이외에 새로이 쇼우와 10(1935)년도에 미감염 아동뵤육소를

신축키로 해 그 경비 24000엔을 계상하여 소록도 내 병원사옥 지대와 건강지대 중간에 한 구획으로서 5

공사를 시작해 벽돌 구조로 기와를 인 영아실, 아동실, 학습실, 창고 및 목조구조로 기와를 인 욕실을 신축해

쇼우와10(1935) 8월 준공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음은 「환자학교」에 대해 보도록 한다. 소록도 갱생원 『쇼우와 10<1935>년 연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제가 있다. 갱생원 당국이「환자하교」설립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환자 가운데 어린 아이의 대부분은 교육을 받지 못한 자이므로 이들에게 지덕함양<智德涵養>의 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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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및 환자 중 학식 있는 자를 골라 강사로서 학원에서 보통학교 교과서에 의거해 그 교과를 가르치고

있으며 차츰 일본어 또는 글을 이해하는 자가 늘어난 사실은 참으로 기쁜 현상이며 현재 그 생도수 288명에

이르며 실제로 수용환자 중 청년으로 잘 의원의 규칙을 지키며 중견인물로서 다른 환자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자들은 학원 출신자가 많아, 한층 이들이 충실하게 힘을 기울이고 있다」

  「환자학교」는 소록도신사 분사 앞에 위치한 「병원 사옥지대」에 지어졌다. 건물은 1935년도로 환자

학교 1동ㆍ99 23, 동 부속가옥 1동ㆍ16 15였다. 1941년도 『연보』에는, 환자학교의 평수는 119

23으로, 직원 자제들이 다니던 소록도 진조우<尋常>ㆍ고등학교에 비해, 평수 면에서 봐도 아주 뒤져 있었

. 환자학교에서는, 「보통학교의 교과서에 의거해 그 교과를」가르치고 있다. 사노 미치오<佐野 通夫>

가 지은『근대 일본의 교육과 조선』사회평론사 (1993년 출판)에 의하면, 이 시기의 보통학교 교과서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이 이루어져, 일본어로 쓰여져, 「황민화<皇民化>」교육의 내용이 실시되어 있다.

소록도 갱생원의 「환자학교」가 실시한 교육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환자에게 「국어」즉 일본어를 습득시켜, 「수용환자 중 청년으로 잘 원칙을 지키며 중견인물로서 다른

환자들의 모범이 되는」 것을 갱생원 당국은 생도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갱생원 교사는 7명으로, 그 가운데

6명은 환자교사이며, 체조과목이라던가 수공과목은 없고, 필수과목만 가르치며, 일본인 직원은 1명이며

야다<矢田>목사가 수신<修身>과목만 가르치고 있다.(나가시마 아이세이엔<長島愛生園> 서기 미야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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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루<宮川量> 1936 7월에 소록도 갱생원을 방문한 시의 적은 메모에 의함).

  갱생원의 환자교사는 「학식이 있는 자를 골라 강사로 채용해」, 환자교사가 일본어 지도를 담당했다.

1937년에 「황국신민의 맹세」가 정해지자, 학교에서도 환자들을 하여금 제창케 했다. 모든 환자들이

그렇듯이, 「늘 황실의 인자하심과 국가의 은혜에 대해 감사할 성의를 갖도록 강조」(『쇼우와 16(1941)

년 연보』)되었다. 갱생원 교사인 강갑수<姜甲壽>, 1941 5 20일에 열린 소록도 갱생원 창립

25주년 기념식전에서, 「환자학원교사로서 다년간 아동 교련에 힘써 그 공로가 큰 이」로서, 특히 갱생원

당국으로부터 표창받고 있다. 조선인 환자교사 중에는, 와세다<早稲田>대학교 등 일본학교를 졸업한 이도

있었다.

  수용환자가 갱생원에 입원하기 전에 가진 직업(각년 12월말 조사)을 보면, 「보통학교(초등학교)아동」의

수가 각『연보』에 실려 있다. 그를 나타내면 밑의 표와 같이 된다.

표Ⅳ 수용환자 중 갱생원에 입원하기 전의 보통학교 아동이던 인원수 (1931~41)

 

   11

   53

   74

   84

   86

   89

   96

  136

  147

 

    5

    1

    5

    5

    6

    6

    9

   13

   24

총계

   16

   54

   79

   89

   92

   95

  105

  149

  171

환자수

  764

2196

3733

3838

4783

5025

5976

6136

5969

  

  2.1

  2.5

  2.1

  2.3

  1.9

  1.9

  1.8

  2.4

  2.9

아동들이 보통학교에서 소록도 갱생원에 수용된 사실을 알 수 있다. 1941년에는 171명에 달하고 있다.

  『동아일보』1937 10 21일의 표제는, 3단짜리며 「나병환자 가정의 아동을 돌연 퇴학처분키로/

칠원<漆原>공립 보통학교에서 단행됨」이란 기사를 싣고 있다. 같은 『동아일보』1935 4 17일의

기사도 「갱생원에서는...... 어린 환자를 위해

P 131

보통학교도 설치해, 현재 아동 150명을 수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센병에 걸린 부모가 있는 어린이도,

병든 아이도, 가정이나 각지의 한센병 취락에서 특별열차나 배를 타고, 소록도로 수용되어 간다. 소록도에

수용된 아이들의 생활이나 교육에 대해, 그 당시의 일본인 관계자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었을까?

  1936 7월 초에 소록도 갱생원을 방문한 나가시마 아이세이엔<長島愛生園>서기인 미야가와 하카루

<宮川量>가 남긴 메모와, 1942 5월에 발행된 『문화조선』 제4권ㆍ제 3호의 취재하기 위해 갱생원을

방문한 소우마 미치<相馬美知>, 사에구사<三枝>기자에 의한 기사 및 좌담회의 내용에 대해 보고, 소록도

갱생원에 수용된 아이들의 실태를 살피기로 한다.

「쇼우와 11(1936) 7월 초, 소록도 상륙. 지케이마루<慈惠丸, 자혜호, 선박명>, 녹동 소록도 사이를 왕복, 유료선박, 그 요금 편도 5전이다.관사 주민 기타 도항자로부터 징수하는 뱃삯은 관사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비용으로 충당한다」

「직원과 환자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원장은 싫어한다고 한다. 잠시 환자 사옥에 가서 (근무 이외의 용건

으로) 환자의 아이를 안아 주고 놀고 있으면 곧 사무직 직원에게 혼난다고 미키 간호사는 말했다.

 

소년소녀에 대해

1.  소년 사옥...... 소년 사옥은 있다. 모든 소년은 아니지만, 10명은 입사하고 있다. 환자가 그 아버지가

P 132

    되어 기독교주의로 기숙사라기보다는 좋은 의미의 수도원과 같다고 한다. 아버지가 앞장서서 변소

    청소도 한다. 마당 같은 것은 깨끗이 손질이 되어 있었다.

2.  소녀 사옥...... 소녀 사옥은 없다. 부모가 데리고 있거나 다른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다.

3.  보통교육...... 갱생원에 재적하고 있는 자, 남녀 250명 매일 출석하는 자, 200.

     교사, 7. 그 중 6......입원자,......체조라던가 수공과 같은 수업은 없으며 필수과목만 가르친다.

     1명 야다<矢田>목사......수신<修身>과목만 가르친다.

4.  일요일 학교...... 매주 일요일에 대부분의 소년소녀가 이에 출석한다.

5.  소년소녀는 비교적 성질이 좋고, 속을 썩이는 자는 없다고 한다.

          미감염 아동에 대해

(7 3일 현재) 남자 8, 여자 4, 모든 아동이 7세부터 13,4세까지의 학동뿐이다. 유아동 가운데

얼만큼의 미감염 아동이 있을지 모른다.

시설 내를 걷자 어머니 혹은 아버지에 안겨진 아기나 우리를 에워싸듯이 모여드는 어린이는 상당수 있었다.

보모도 없고, 손도 많이 가므로 수용은 안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직원 남자 선생 한 ... 아이들이 잠들면 관사에 돌아간다.

P133

여자 선생 한 명...이전에 경성<京城> 초등학교 교사이던 사람.현재 교도소 포교사인 승려의 처. 물론

통근이다.(분을 얼룩지게 발랐었다.)

기타 조선인 취사부 한 명, 건강해졌다는 환자 한 명, 이가 보육소에서 잔다.

어떤 사람인지 만나 볼 수가 없었다.

부기

큰 아이들의 집에는 온돌시설, 유아동의 집에는 스팀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보육소는 마치 환자구역 내에 있는 듯하다. 다소 높은 언덕 위이긴 하지만, 바로 밑에는 환자들이 있고

     위에 위치한 벽돌공장에서는 환자도 일한다.

    그들 아이들에게 불과 이만큼 밖에 안 되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의 생활은 너무나도 딱하다.

 직원은 둘 다 열심히 모기장을 다는 등 아이들을 잘 돌보는 듯했다.

단 곤란한 일은 아이는 부모의 영향으로(시설 안에서 온 아이만) 모두가 기독교신자이지만, 선생님은

승려의 처라. 아이들이 늘 부르는 노래도 함께 불러 줄 수가 없다.

아이들은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 한다. 또한 잘 알아듣지도 못 한다. 두 직원도 조선말을 잘 모른다.눈에

띄고 느낀 점은 이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이들 선생으로부터 배운 [하늘도 항구도 밤에는 개며]라던가 [새끼 참새]

같은 노래를 불렀다.

아이세이엔 아이들이 그림이라도 보내 준다면 기뻐하겠지. 그들은 서예를 잘하니까 그림과 서예 작품을

교환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P134

다음으로, 아시아ㆍ태평양전쟁 중인 1942 5월에 조선총독부 철도국 내에 있는 동아여행사 조선지부가

발행한 것이다. 편집후기에는 「본호는 그 찬연한 성전의 충후에 문화성전으로서의 『소록도갱생원』의

존재를 세계를 향해 자랑하고 싶다. 『소록도 갱생원』의 사업과 생산적 자원과 함께 인도적 자원으로서,

훌륭히 동아 일본을 위한 미래에 도움이 될 『가치』인 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 『문화조선』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소록도의 아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a) 「소록도 갱생원 방문기」 소우마 미치<相馬美知>

「……동해안의 소나무 가로수에 가까운 골짜기에 넓은 운동장이 있는 소록도 국민학교가 있다. 갱생원 직원

   의 아동이 150명 남짓 다니며 선생이 5명이라 한다.

  이 치료본관과 중앙병사를 나와, 미감염 아동 수용소를 방문. 미감염 아동! 아무리 살붙이라 해도 나병이

발병한 환자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의 연민과 비인간성이란 점에서 이 갱생원에서는 분리해서 보육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도 소록도 갱생원의 높은 인도적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며,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수용소 바로 동쪽에 수오우<周防> 원장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P135

그리한 후 환자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앙공회당을 보고 나병 아동의 학원을 본다. 교사는 역시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한 나병 환자이지만, 전적으로 감사히 살며, 아동들에게 황국에서 태어난 이들의

행복을 가르치고 있었다.

 

b) 「갱생원 현지 좌담회」

기자 : 나병은 일반사회에서는 지금까지 유전병인 양 생각되었으나, 이제는 전염병으로 결정된 거죠?

이치하라<市原>기수 : 전염병입니다. 유아에게 전염되기 쉽습니다. 발병은 대체로 15세부터 20세까지가

많으나 7세 정도로 발병하는 환자도 있습니다.

기자 : 태반전염은 하지 않습니까?

이치하라 기수 : 쥐나병에서 태반전염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서 인체에서도 꼭 그렇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타케우치<竹內>의관 : 이곳에서는 7세가 가장 어리며 벌써 망울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치하라 기수 : ……나병균이 있으며 병상이 진행되는 이상 분명히 전염병입니다.

                               걸리기 쉬운 체질이라는 경우는 확인되긴 합니다만.

기자  :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은, (환자와) 분리시키면 괜찮은 겁니까?

이치하라 기수 : 곧 분리시키면 구할 수 있습니다. 이곳의 미감염 아동은 5,6세 정도까지는

 

P136

                          부모와 함께 있던 것을 미감염아로서 분리시키고 있습니다만, 중간적인 존재네요. 어른은

그리 쉽게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이와 같은 메모나 기사를 읽고, 갱생원 당국 측이 정한 코스를 따라, 임립하는 소록도 갱생원의

건물을 짧은 시간 보고 다닌 사람이 쓴 「소록도 갱생원 방문기」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갱생원의

직원들도, 실은 소록도 전체를 6가지의 취락(생리<生里>)로 나누어, 6000명이나 수용한 환자의 생활이나

노동, 의료 실태를 모르고 있고, 또한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일본인 직원의 대부분은 조선말을

읽지 못 하고, 환자들과 조선말로 이야기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은 「일본 황실의 인자하심」이라던가 「황국에 태어나는 자의 행복」이라

해도,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인 환자에게는 격리ㆍ단종수술ㆍ학살…… 로 얼룩진 생활의 연속이며,

신앙이나 언론의 자유도 인정되지 않는 나날에 불과했다. 소록도를 방문하는 일본인들은 소록도 갱생원의

정해진 코스를 걷어다니며, 「이 섬의 나병 요양소를 볼 때, 고요한 바다, 소나무의 초록, 수준이 높은 문화적

시설과 의학, 아니 그 어느것보다도 훌륭한 갱생원 자체의 애정」(『문화조선』의 서문)과 소록도를 찬미한다.

그것이 환자들에게 얼마나 싸늘한 것이었을까?

  미야가와 하카루<宮川量>가 쓴 메모를 읽으면, 갱생원 직원들이 수용된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을 두고,

미야가와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일본 요양소에 근무하며 아이세이엔<愛生園> 원장인 미츠다 켄수케

<光田健輔>의 신봉자이었던

P137

미야가와는, 허구의 「가족주의」를 믿고, 아이들의 「격리」조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다.

미야가와조차도 소록도의 실태에 의문을 갖는 점에 일본 구 식민지하의 의료, 교육의 「본질」의 일단이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소록도 직원의 아이들

 

  「바깥 사람들은 환자와 직원과의 생활에 구별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 지역은 

엄중히 나뉘어져 있고, 생활도 따로 하고 있고, 소독도 제대로 행해져 있다는 점을 이해시키고 싶습니다. 

라고 소록도 갱생원의 요코가와 ... 서무과장이 『문화조선』(1942년 신록호)의 갱생원 현지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요코가와가 말하고 있듯이, 소록도는 직원지대와 병원사옥지대가 삼엄히 구별되어 있었다. 

 

 

  최창기<崔晶基> 가 지은 『일제 지배하의 조선 나병환자 통제에 대한 일연구』(전라남도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1994 2)에서, 「요양소 내의 시설구조」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P138 

   「소록도 갱생원은 독립된 섬 전체가 하나의 요양소가 되어 있었다. 바다라는 천연의 장애물이 수용환자 

들과 일반사회와의 교류를 막는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단 섬 전체를 환자의 거주 지역과 직원 거주 지역 

으로 구분하고,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 공사가 끝난 1939년도 말, 소록도 갱생원은 소록도 중앙 지역에 병원이 위치하여, 그곳 

을 경계로 선착장의 동북 측에는 직원 주택지대가, 그 선착장의 반대 측인 서남 측에는 환자들의 병자지대 

가 산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그 구조 자체가 감금체계이며, ……사무본관은 직원들의 주택지대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무직원들과 환자들과의 접촉은 최소한의 수준으로 이루어져, 직원의 주거 지역과 환자 

주거 지역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직원의 자식들이 다니는 소록도공립 초등학교의 소재지도, 소록도 직원지대의 동북단에 지어졌다.  

소록도공립 초등학교의 연혁은, 소록도 갱생원 『쇼우와 13<1938>년 연보』(1939 10월 발행)에 상세 

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그 후의 추이에 대해선 『쇼우와 14<1939>년 연보』,『쇼우와 15<1940> 

연보』, 더욱이 전후, 소록도 갱생원의 전 직원으로 결성된 「소록회<小鹿会>」가 발행한 『섬의 소식』지 

등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러한 여러 자료를 참고로 삼아, 소록도 갱생원 직원의 자식들의 학교생활을 보도록 

한다. 

   1917, 소록도 지케이<慈恵>의원 개설 당시부터 10수 년 동안은 소록도 내에는 학교는 없었기 때문 

에 지케이의원 직원은 타 지방의 초등학교에 어머니나 언니(누나)와 함께 살게 하며, 혹은  

 

P139 

일본 국내의 향리에 보내 초등교육을 받게 했다. 그 때문에 직원이나 그 가족은 「정신적 및 물질적으로 

많은 고통을 참아 온 상태이며 소록도 내에 초등학교 설립을 통감하고 그 설립에 관해 종종 협의한 바가 

있으나」(소록도 갱생원 『쇼우와 13<1938>년 연보』P.54), 여러 종류의 사정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실행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1929 10, 소록도 내의 일본인으로 학교조합조직에 대해 의결하고, 익년인 1930 3월에 조선총독 

의 허가를 받아 소록도 학교조합을 설립해, 초등학교 개설 허가를 받자, 지케이의원 직원 대기실 1 15 

, 교사부지 70평의 관유재산사용 허가를 얻어, 같은 해인 1930 6 6일에는 임시 교사로 소록도공립 

진조우<尋常>초등학교를 개교했다. 그 당시는 단급제이며 통학아동 수는 23명이었다. 그 후로 교사부지 및 

운동장으로서 지케이의원 부지 400평 관유지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했다. 

   그 후, 통학아동 수는 차례로 늘어나, 종래의 단과제로는 교수가 곤란하므로, 1934 4 1일부터  

2학급 편성으로 개편함과 함께, 고등과를 병설했다. 같은 해 10월부터 소록도 지케이의원은 소록도 갱생원 

으로 개칭되어, 대확장을 실시키로 했기 때문에, 종래의 교사 위치는 병원 사옥지대에 편입될 결과, 소록도 

동북단 관유지대의 적합한 부지에 교사를 신축했다. 학교 부지는 3120, 건물 평수는 별돌 구조로 기와로 

지붕을 인 교사 및 부속 건물 90, 교원 숙사 3 44 65이며, 1935 3월 준공해, 4 1일부터 

3학급 편성으로 개편했다. 이어서 『쇼우와 13<1938>년 연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P1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록도 내에는 갱생원 이외에 형무소(교도소), 우체국, 나병 예방협회 사업부 등

각종 기관이 있으며 이들 직원들 약 300명이 있어 그 중 조선인 직원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자녀

중 학교에 다닐 연령에 달한 자가 상당수에 이르나 소록도 내는 물론이며 그 부근에 통학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이들 조선인 자녀들의 교육기관이 없다는 것을 조선인 학부형들이 가장 고뇌하는 바이며 앞서 서술한

각 기관에서도 직원으로 적당한 인물을 얻기가 곤란하다는 실정을 미루어 전라남도 당국 양해 아래

쇼우와13(1938) 1월부터 보통학교에 통학하는 소록도 내 조선인 직원의 자녀를 데려와 도내 초등학교에

취학시켰다. 이는 조선에서의 초등학교 내선공학<內鮮共學>의 선구로 하여 내선공학에 관해 가장 우려되는,

조선인 자녀들이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으로 기인한 교수들의 곤란함을 완화하여 장래에 대비하기를

주요 목표로 삼아 아울러 내선공학 상 상호융화 적응을 목적으로 하는 내선유아보육기관을 설치해

쇼우와13(1938) 6월부터 시험적으로 실시한 바 예상 밖으로 좋은 성과를 거둔 사실로 인해

쇼우와14(1939)년도부터 본격적으로 내선공학을 실시하고 있으며 41일 현재 통학 아동이 140명에

이른다. 

 

   

   3기 확장공사와 함께, 소록도갱생원의 수용환자는 1200명 늘어나, 그에 따라 다수의 직원이 동원되어, 

통학하는 직원의 자식들도 극증했다. 1939년도에 1학급 증설해, 4학급 편성으로 하는 한편, 아동수도도  

증가하므로, 공사비 12220엔을 들여 20평 교실 4, 교원실 1, 표본실 1,  

 

P141 

120평의 증설을 실시했다. 

1941년도부터 더 1학급을 늘려, 5학급 편성으로 하고, 1938년도 6월부터 시험적으로 실시한

일본인ㆍ조선인 유아보육기관이 「성적이 양호한 점을 감안해」1940 6 20, 당국의 허가를 얻어

초등학교 부설 정식 유치원이 되었다. 1940년 말 현재의 통학아동은 142, 다음해인 41 3월 제 1

보육수료자는 39명이었다.    소록도공립 진조우<尋常>초등학교에서는 문부성 국정교과서를 사용했다.

이전에는 조선인 직원의 자식은 대안의 보통학교(조선인이 다니는 「초등학교))로 통학하고 있었다.

1938년부터는 소록도 공립 진조우<尋常>초등학교에서 일본인 직원의 자식과 함께 배우게 되었다.

아이들도 같은 교과서를 쓰고, 일본인교사에 의한 지도를 받았다. 『섬의 소식』6 (1995 8)에는

「쇼우와 14<1940> 3 20일의 사진」으로 남자 3 (카지하라<梶原>, 수주키<鈴木>,

노우치<野内), 일본전통의상을 입은 여자 4(모리타<盛田>, 수주키 <鈴木>, 타마이<玉井>, 타카하라

시나<高原シナ>) 7명의 소록도 초등학교 직원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남자 가운데 2명은

예식복(훈장을 단 중앙의 인물은 학교장인가), 남은 1명은 갱생원의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다. 사사키<佐々木>, 수기모토<杉本>, 테라카도<寺門>의 각 교사들은 그 후 전입이라 되어 있다.

와키<>, 안도우 <安藤>, 모리야마<守山>의 각 교사들은 이 이전에 전출되었다고 주기되어 있고,

연월일이 기술되어 있다.    직원지대에 사는 직원 자식들은, 병원 사옥지대에 사는 환자 자식들과 교류하는

일은 없었다. 갱생원 측에서 「병이 옮는다」고 한센병 감염의 공포를 아이들에게 

 

P142 

선정해, 직원 자식들이 병원 사옥지대로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병원 사옥지대는 「격절된

거리」 였다. 밑의 그림은 소록도공립 진조우 초등학교 약도이다. 고 하야시 세이지<林成二>씨가 1994

11월에 보내 주셨다고 쓰여져 있고, 『섬의 소식』6호에 실려 있는 것이다. 

 

3    잊어서는 안 되는 일

 

   소록도에 계시는 한 할아버지는, 소년 시절에 장작으로 나뭇가지를 잘라낸 것에 대한 처벌로서 단종수술 

을 강요받았다. 소호우 마사수에<周防正季>원장 시절이다. 현재는 실명 상태이며 국립 소록도병원의 장애 

인 병동 집단실에서 요양하고 계신다. 일본인인 저에게 샅에 새겨진 단종수술의 흉터를 보여주시면서 

자신이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원통함을 이야기하셨다. 더욱이 일본에게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 할아버지가 갖고 계시는 무거운 바람을 어찌 받아들이면 좋은 것일까? 일제 구 식민지하의 한센병환자에 

대한 가해의 사실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거의 모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론에 처음에서 저는 전전의 『아이세이<愛生>』의 「아동문학」란에서 콘도우 히로카즈<近藤宏一> 

「제 아버지」를 소개했다. 1939년에 고등초등학교 1학년이던 콘도우 씨는, 패전 후, 아이세이엔<愛生園> 

에 계신 실명자를 중심으로 하모니카 악단인 「파란새」악장이 되어, 동경ㆍ나고아<名古屋>ㆍ쿄토<京都> 

ㆍ오오사카<大阪> 등 각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그 악단 「파란새」의 연주회에서 마지막의 연주곡목은 

늘 「문부성 창가ㆍ후루사토<故郷,고향>」였다고 한다. 

 

 

P144 

 

   1. 토끼를 쫓던 그 산이오 

      붕어를 낚던 그 내오 

      꿈은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며 

      잊혀지지 않는 고향이오 

 

   2. 어떻게 지내실런지요 어버이요 

      잘 지낼는지 친구요 

      비 오나 눈이 오나 

      마음에 떠오르는 내 고향이오 

 

 

   실명되어 계시는 콘도우 씨는, 지금은 나가시마 아이세이엔<長島愛生園> 3센터(중도 장애인동)」에서 

치료를 계속 받고 계신다. 저는 콘도우 씨께 「후루사토<故郷、고향>」의 하모니카로 연주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하모니카 4자루를 쓰신 훌륭한 콘도우 씨의 「후루사토」를 들으면서 저는 가족과 고향을 빼앗긴 

한센병 환자를 두고 「평생 강제격리」할 것을 주장한 사람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