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병문제 검증회의에 제출한 의견서

 일제 식민지하 조선에서 실시된 한센병 정책의 피해와 

 그 책임소재를 밝혀라.

타키오 에이지

滝尾 英二

인권도서관ㆍ히로시마 세이큐우문고

 人権図書館ㆍ広島青丘文庫

 

한센병문제 검증회의에 제출한 두 가지의 질문서

 

편집부 : 2004 6 27일 동경에서 한센병문제 검증회의가 열려, 그 회의를 방청하신 거죠?

검증회의가 올해(2004) 3 31일에 발행한 『2003년도 한센병문제 검증회의 보고서』를

읽으시고 나서 강한 위화감을 느끼셔서, 검증회의에게 두 번에 걸쳐 의견서ㆍ질문서를 제출

하셨다고 합니다만, 검증회의로부터 어떤 회답은 없었던 거죠?

타키오 :회답은 보내지 않겠답니다. 따라서 저로서는 내년(2005) 3월말에 나올 최종보고서

를 회답으로 삼고자 합니다. 단 좌장 앞으로 제출한 의견서ㆍ질문서 말입니다만, 실제로

조사나 분석을 담당하고 계시는 검토회 위원께 넘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문제입니다.

왜냐면 실질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검증회의 좌장(카네히라 테루코<金平輝子>,전 동경

도 부지사)나 부좌장(우치다 히로후미<内田博文>, 큐우슈우 대학교 법대)이 아니라, 검증회의 밑에 설치된 검토회 각 위원 여러분이기 때문에, 특히 제가 이번 문제화시킨 구 식민지, 일본점령지역에서의 한센병 정책 ( 10)을 집필한 로 코우바이(<魯紅梅>준텐도우 대학교 의대)와 우생사상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위원 여러분께 건네주었으면 했다는 것입니다.

p.101

2003년도 보고서』에 대해선 여러 비판이 있습니다만, 주로 제가 제기하고 싶었던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에서 펼쳐진 한센병 정책에 대해서입니다. 가장 노골적으로 일제의 한센

병 정책으로 인한 인권침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식민지에서는 환자에게 시술된

우생수술(단종수술)은 우생사상에 의거한 환자절멸정책이었다는 점에 덧붙여, 치안확보 혹은

처벌로서 이루어졌습니다. 직원이 한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감금실에 가둬놓고,

그곳을 나갈 때, 단종수술을 강요시켰다라고 하는 사실이 이 검증회의 보고서에는 전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강조노동이라던가 신앙의 자유를 빼앗았다는 문제를 포함해, 그런 문제들이 거의 쓰여 있지 않고, 검증회의에서 식민지문제의 자리매김을 일본 국내 요양소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 일조가 되겠다., 다시 말해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쓰인다면, 그것으로 괜찮은 것인가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 한국 전라남도에 위치한 국립 소록도병원(일제 당시는 소록도 갱생원<更生園>)에 식민

지시대에 강제수용된 한센병환자 117, 게다가 대만의 요양소인 낙생원<楽生園>”의 25명도 참석할 듯합니다만, 그분들께서 일본국내와 마찬가지로 일제식민지에서도 한센병환자를 격리하

는 시설을 지어, 일본국내보다 더욱 과혹한 인권침해가 이루어졌던 사실에 대해 한센병 보상법

을 적용시킬 것을 요구하는 소송이 제기되려 하고 있습니다. 현재(04)는 사카구치 치카라 <坂口力>후생노동성 장관에게 보상을 신청 중이며, 기각되면 당장 법원에 제소할 수 있는 준비를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세가 강합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6 11일에 첫 의견서로서, 소록도에 대해 쓰인 부분에 한정해서 18항목으로 구성된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지금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자원약탈과 무기산업을 중심으로 한 이윤추구를 위해 이라크에

대한 침략적 해위와 학대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에 가담하는 코이즈미 정권은, 옛 식민지정책

이 가진 잔혹함, 비인간성을 생각하지 않은 채 다시금 같은 길을 나아가려 하는 사실에 제

나름대로 위기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을 고려할 때, 역사적 검증은 단지 과거는 과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 현재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라는 점에서 과거를 돌이켜보고 그리고 장래를

향한 문제로서 과거를 인식하지 않으면, 과거를 현재와 단절된 것으로 파악하면 현재 내지는

미래의 문제해결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우생보호법이 1948년에 생긴 이후, 거의 50년 동안이나 제 3 3호에 라이(

)항목이 포함된 채로 존속된 까닭은 무엇인가? 우생보호법이란 유전성 질병은 모두 열성

으로 간주해 말살하겠다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 항목이 어째서 1996 3 31일 라이예방법이

p102

폐지되었을 때 우생보호법에서 제외되었는가? 그 부분이 사람들 앞에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습

니다. 96 6월에 우생보호법 자체가 폐지되어 모체보호법<母体保護法>이란 것으로 탈바꿈하

게 됩니다만, 그 단계에서도 그 책임소재와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법을 쉽게 바꾸고 맙니다.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그러한 인권침해가 남아 있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전혀 불문에 부친 대로 폐지되었던 것은 아주 유감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윽고 라이(나병)예방법이 남긴 피해라는 형태로, 오카야마<岡山>ㆍ동경 각 지방법

원에서 소위 한센병 국가배상재판이 제소됩니다. 그 주요 문제는 우생보호법으로 인해 강제로

시술된 단종수술이며 중절(낙태)이었던 것입니다. 어째서 우생주의에 의거해 열성 인간이라고 정해져 죽음을 당했는지. 단종ㆍ중절(낙태)뿐만 아니라 영아 살인까지 있었던 것입니다만,

역시 이것은 일본국가가 사실을 인정해 사과를 해, 향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겠죠. 그런 조치 없이는 재발방지가 말로만 끝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 새 단장을 한

새 우생보호법으로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의견서(2)에서도 썼습니다만, 실제로 출생 전에

진단이 이루어져, 태어날 아기의 유전자가 열성일지 어떨지를 미리 진단해서 출생을 막는다는

생명의 존엄에 대한 유린이 다시금 정부의 손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을 만큼, 검증회의에서

이 문제의 역사적 범죄성을 분명히 밝혀 그 책임과 사과, 또는 그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또다시 새 우생주의에 인한 피해나 인권 침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또 난치병

이라던가 괴병이라 일반적으로 불리거나, 사회적인 규모로 발생할 것이라 예상되는 질병에

대해서도 국가로 인한 적절한 대응이 취해지지 않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런데도 검증회의

에서는, 왜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장래를 향해 생각해 나가는 부분이 결정적으로 결여

되어 있는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검증회의의 보고에 따르면, 내년(05) 3월에는 최종보고서가 작성될 듯, 현재 집필준비가

한창이라고 합니다만, 그러한 점을 어떻게 해서라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해서 6월에 2통으로 된

의견서를 좌장인 카네히라<金平輝子> 씨에게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나 검증위원회 전날인 6 26일이 되도록 각 멤버에게 건네주지도 않았습니다. 카네히라

좌장은, 이전의 라이(나병) 예방법 검토회의 위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만, 왜 공개적인 자리

에서, 공개적인 자료로서, 제가 제출한 의견서가 각 멤버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일까?

제출한 의견서가 최종보고서 작성에 활용되지 않는다면, 아주 안타깝습니다.

P103

편집부 : 그런데, 한센병문제 검증회의이란 어떤 단체인가요?

타키오 : 근본적인 문제가 국회에 있다는 이야기는 『츠부테(飛礫)34 (『한센병문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에 기술한 바입니다.

  2001 5월 쿠마무토<熊本> 지방법원에 판결이 나오자, 코이즈미 수상은 동경도의회의원

선거와 참의원(상원)선거를 눈앞에 두고 일종의 인기획득이란 면도 있었겠지만, 항소를 단념했

습니다. 항소 포기를 했기 때문에 지지율이 85%에 오른 겁니다. 코이즈미 수상의 항소 단념은 정치적인 생각에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심각한 인권침해를 받았다는 점에선 미나마타병<水俣病>도 마찬가지입니다. 칸사이 미나마타

병 재판의 원고도 같은 시기(01 4 27)에 오오사카<大阪> 고등법원에서 승소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칸사이 미나마타병 소송은 대법원에 상고하면서도 한센병 소송은 항소를 단념한다는 대단히 모순된 행동을 동시에 취하고 있습니다. 미나마타병 소송의 경우는 원고단

도 소수여서 여론에도 알려져 있지 않은 탓에 지지도 적었던 것에 비해, 한센병의 경우는 급속

히 여론이 달궈졌다는 사정이 영향을 끼쳤을까요? 코이즈미 수상이 진심으로 인권침해의 심각

성을 생각하고 있다면 한센병 항소 단념과 동시에 미나마타병 상고도 동시에 단념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어느 쪽도 차별을 받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원고이기 때문

이죠.

 그리고 항소단념에 의거한 국회결의라는 것이 이루어집니다만, 야당사안에는 진상규명이라

는 말이 있었지만 이 말을 빠뜨려서 사과의 뜻쇼우와 60(1985)년의 대법원 판결을 이해하며란 문구를 넣은 겁니다. 그리고 진상규명을 후생노동성에 넘겼습니다. 국회는 국가의 최고 입법부<立法府>임과 동시에 강력한 힘으로 증인이나 참고인을 소환해 한센병의 진상을 밝혀 논의할 수 있는 기관임에도 불구, 그를 수행하지 않고 진상규명을 후생노동성에 넘겼습

니다. 그러자 후생노동성은 자신의 책임으로서 한센병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한센병문

제 검증회의의 『2002년도 한센병문제 검증회의 검토경과 보고서』(2002 3 31)에 쓰여 있듯이, 2001 12 25일에 『일본국가로부터 독립된 제3자에 인한 한센병문제에 대한 역사적 검증사업을 행하기로 해,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검증회의의 설치』를 전국 원고단협의회,

전국한센병요양소 입소자협의회, 한센병 위헌국배소송 전국변호단연락회의 3자에게 약속한 것입니다.

 3자에게 위탁해 자유롭게 검증하게끔 했냐고 하면, 경과 보고서를 보면 2002년 당초의 검

증위원회는 사카이 시즈(酒井シズ、준텐도우 대학교 의대)가 좌장이며 후지노유타카

<藤野豊> 씨도 소속돼 있었습니다만, 위원의 구성이라던가 위원회 개최 순서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고 해서,

P104

후생노동성은 정식 위탁이 끝난 검증회의를 좌장도 포함해 백지 상태로 되돌린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후지노 유타카 씨도 잡지 『세계』718(2003 9월호)에 쓰셨기 때문에 보셨으면 하네요. 그런 식으로 후생노동성은 자신에게 이로운 사람들을 위원으

로 뽑으려 한 것입니다. 이 처사는 물론 반발을 불러일으켜, 원고나 전국변호단의 반대도 있고 해서 후지노위원도 검토회 위원 및 검증회의위원으로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업은 재단법인

니치벤렌<日弁連> 법무연구재단에 위탁되었습니다만, 일본정부로부터 2002년도에는 5000만엔

( 5억원)의 예산을 받아 일본국가로부터 위탁받은 사업으로서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황태후 사다코들 황족의 책임을 왜 문책하지 않는가?

 

타키오 :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2003년도 검증회의 보고서』를 보면 확실히

황태후 사다코(皇太后節子, 타이쇼우 천황의 처)<--보고서에는 테이메이<貞明> 황후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이는 죽은 후에 지어진 시호이며, 저는 황태후 사다코라고 하겠습니다-->와 나병예방협회 설립, 사다코가 세상을 떠난 후인 1952년에 나병 예방협회는 토우후우(藤楓)

협회란 이름으로 탈바꿈을 하지만 그곳에서 한센병환자들에게 베풀어진 황실의 인자하심에 대해 전후도 계속되어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 황태후 사다코는 1930년 경부터 한센병에 관심을 가져, 고나이도킨<御内帑金>(황실 수중에 있는 돈)으로부터 후원금도 어느 정도 내면서, 일제의 한센병환자 절대격리를 요인하여

격려했습니다. 1907년에 생긴 법률인 나병 예방에 관한 건에서는 한센병은 평생격리가 아니었는데, 파시즘이 진행됨에 따라 1931년에 평생격리를 주장한 나병 예방법이 되어, 황태후 사다코가 낸 후원금인 10만엔(지금의 약 45억원)으로 나병 예방협회가 생기는 것입니

.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에서도 1932년에는 조선 나병 예방협회가 생겨 1935년에는 조선 나병 예방령이 공포되었습니다. 그 사다코의 생일인 6 25일과 그날을 중심으로 앞뒤를 “나병 예방의 날로 삼아 제 1회 나병 예방의 날이 1931, 제가 태어난 해에 치러졌습니다. 이는 미츠다 켄수케[<光田健輔>1876~1964, 젠세이<全生>병원장, 훗날 국립요양소 나가시마 아이세

이엔<長島愛生園>원장. 1933년과 40년에 소록도를 방문 )가 동경방송국의 NHK라디오를 통해 황태후폐하의 생신을 기념하여 그 인자하심에 보답하기 위해라며 (나병환자의)절대격리와 황태후의 인자하심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익년(32)의 제 2회에서는 NHK오오사카 방송국에

서 하야시 후미오(<林文雄>, 미츠다 켄수케의 무릎제자. 젠세이병원에 있을 때, 소록도를 방문)

나병을 없애는 3가지의 힘이라며 그 첫 번째로서 황실의 인자하심을 선전해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 미츠다의 계보가 지금도 계승되어 있는 것입니다.

 P105

 제가 재작년(02) 6월에 쿠마모토<熊本>에 갔을 적, 6 25일을 중심으로 한 1주일을 한센병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주라며 행사가 짜여져 있다고 그곳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쿠마모토현청에 가서, 어째서 한센병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날을 아직도 사다코의 생일로 하는지, 어째서 쿠마모토판결이 내려진 5 11일로 하지 않는지 항의를 했습니다만, 저를 상대한 한센병 담당자가 낸 자료가 후생노동성이 각 지방자치단체에 내린 통달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한센병의 예방과 환자 구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모으신 테이메이 황후의 생신이신 6 25일을 포함한 주의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표기주간으로 삼아....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후생노동성의 방침이라서 이에 의거해 쿠마모토현도 그리 하고 있다라고 하기에 이야말로 무 나병운동이 그랬듯이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바를 무작정 똑같이 따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강력히 항의를 했습니다.

 이리하여 후생노동성은 지금 현재에서도 여전히 황태후의 인자하심, 즉 절대격리를 확립하

고 나병예방협회를 설립해 그와 동시에 각지의 요양소장을 격려하면서 절대격리를 추진해

인권을 무시한, 이러한 황태후 사다코의 생일에 행사를 치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쿠마

모토 지방법원의 판결에서 배우고자라던가 이를 살리자고 해도, 그렇다면 한센병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주 5 11일 전후에 정하면 될 것을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검증회의 보고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부분을 문제시하지 않은 채로 옛날 일을 아무리 캐내서

써봤자 그것은 지금 현재의 문제가 될 수가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찍이 후생노동성이 해 왔던 짓은 비판할 수 있어도, 혹은 일본정부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반성하고는 있어도,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어찌 생각하는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비판도 못 한다면, 이런 태도는 역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진상을 밝힌다는 일에 대해 중립성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국가의 형편에

따라 어떠한 일이 바뀌기도 하고, 바뀌지 않기도 한다는 일이, 이번 3월에 작성된 2003 

도 한센병문제 검증보고서를 보면 아주 현저히 두드러지는 듯합니다.

 

편집부 : 검증회의를 방청하셔서,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타키오 : 6 27일은 검증회의와 검토회가 이룬 합동회의에서, 로 코우바이(魯紅梅) 씨가

일제 식민지하의 한센병 정책에 대해 보고해 그 다음에 마츠바라 요우코(<松原洋子>, 리츠메

(立命館) 대학교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교수)를 중심으로

P106

후지노 씨들도 협조해서 우생보호법의 성립과정과 그 후 40수년에 걸쳐 우생보호법이 이어져,

그것이 책임의 명확화와 사과도 없이 라이(나병) 항목이 삭제된 사실 등을 보고하셨습니다.

1948년에 성립된 우생보호법 가운데 어째서 라이(나병) 항목 GHQ의 승인을 얻어 들어간

것이냐에 대해서는 마츠바라 요우코 씨가 쓰시는 듯합니다.

 제 의견서ㆍ질문서의 취지는 1996 4 1일 시행된 나명 예방법의 폐지에 따른 법률에서

는 우생보호법 가운데 제 3조 제 3호와 제 14 1 3, 즉 한센병 항목(라이 항목) 부분만 삭제하겠다고 했습니다. 우생보호법 자체도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단 법률에서 삭제했다는 점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생사상에 대해서는 그 당시의 칸 나오토<管直人>후생성 장관이 사과를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랫동안에 걸쳐 우생주

의가 계속돼, 많은 인명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태어나야 할 목숨이 태어날 수가 없었다는 억울

, 아이를 낳고 싶었으나 낳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소재와 요인, 그에 의거한 사과와 보상이 일절 이루어지지 않은 채, 40년 동안 계속된 것을 그저 법률로 지워 간다. 이 점이 검증

회의에서 거의 쓰여져 있지 않은 점, 혹은 앞으로도 쓰이지 않을 것이 아닌가 라는 점을 우려

해서 쓴 것입니다.

 

 국가책임*행정책임이 추궁 받고 있는 겁니다. 이 부분이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꼭 추궁했으

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을 추궁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울 것이란 생각도 하고 돌아왔습

니다. 우수한 우생보호법의 연구자가 참석하고 있는데도 불구, 제대로 살리지 못 하고 있는 면도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본의 우생학 그 자체가 아시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는 않더군요. 대부분이 아프리카ㆍ유럽ㆍ나치 독일을 포함한 연구이며 구 식민지나 아시아

에서의 우생사상이나 그에 의거한 인권침해의 문제가 주제로서 거의 올라오지 않습니다. 2003년도 한센병문제 검증회의보고서』에서도 「제10 구 식민지ㆍ일본점령지역에서의 한센

병 정책」의 장에서는, 그 당시의 우생사상에 대해서 단종(불임)이나 낙태, 인공임신중절과 같은 문제가 거의 쓰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종을 시술한)그 근거는 한센병이 유아에게 감염되기 쉽다는 그저 의학적인 논리뿐이었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구 식민지에서는 아시다시피 병이 진행된다던가 유아가 감염되기 쉽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단종(불임수술)의 이유가 되지도 않습니다. 이유의 한 가지는 격리시설의 질서유지나 도망방지

에 있습니다. 1941년에는 약 840쌍에 단종수술을 강요해 남녀를 동거시키고 있습니다. 이 행위

는 일본에서도 했었습니다. 그 밖에도 한국에서는 소록도갱생원 직원에게 집단으로 하소연했다

라던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던가 도망쳤다던가, 소록도내의 나무를 베었다던가....

P107

소록도에서는 날쌀은 주어졌으나 자취를 해야만 했습니다. 소록도 내에 있는 나무는 베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연료는 주지는 않았습니다. 환자들은 다른 섬에 땔감이 될 만한 나무나 나뭇가지나 잎사귀를 주우러 갔던 것이죠. 장작으로 쓰려고 소록도의 나뭇가지를 벤

13세 소년이 단종수술을 강요당했습니다. 이는 분명히 결혼과 아무런 상관없는 처벌이죠.

감금실에 갇혀 영안실 및 해부대에서 단종이 시술된 것 같습니다. 현재 국립소록도병원 게시판

에서도 「이 자리에서 단종이 행해졌다」고 적혀 있어서, 병원 측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단종수술을 당한 이동<李東>씨가 지은 시가 기록으로서 남겨져 있습니다. 소나무를 심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친구가 쓰러졌기 때문에 병원에 데려가, 직원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 로 감금실에 갇혀 거기서 나올 때 단종수술을 당한 겁니다. 한국은 일본보다도 유교의 영향이 강한 나라이므로 자신의 조상에게 죄송스럽다, 25살의 자신이 갖는 현재의 슬픔, 어머니가 그토

록 원하던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지었습니다. 아무래도 의사가 아닌 간호사의 손으로 의해 단

종수술이 이루어진 듯합니다.

  7년 전에 TBS(동경방송) 카메라가 처음으로 소록도에 들어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카메라

맨을 두고 저와 비슷한 연배인 단종수술을 당하신 분과 함께 면접실에 갔습니다. 그 분께서는

시력을 잃으셨으나 방에 들어가자 아랫도리를 벗고 단종수술의 흉터를 보여 주셨습니다. 새하

얀 샅에 붉은 지렁이가 기어다닌 듯한 흉터였습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유리로 벤 흉터가 있습

니다만, 그보다도 심한 흉터였습니다. 메스로 베지 않은 듯한, 아마 둔기로 벤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분께서도 (소록도 내의) 나무를 베었다는 이유로 처벌로서 단종 수술을 강요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TBS방송에서도 소개되었고,

미라이(未来)사에서 출간된 제 저서인 (『조선 한센병사 구 일본 식민지하의 소록도』2001

)에도 기술했습니다.

p108

이런 식으로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한센병 환자를)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소록도에세 근무했었던 간호사에게 물어봤습니다. 소록도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만든 소록회

라는 모임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모두가 연로하셔서 모임은 갖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그 분은

단종수술은 부부가 함께 사는 조건으로서 병원내에서 의사의 감독하에 간호사가 보조해 시술을

했고, 감금실 해부대에서는 시술하지 않았다고 말했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살 것이라고 신고를

하고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는 소록도 후생원의 『각연도 연보』에 나오므로 확실

합니다. 그러나 제가 실제로 본 할아버지의 흉터는 메스로 벤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단종수술

을 강요받은 그 당시, 소년이었습니다. 분명히 의사나 간호사가 시술하지 않아, 처벌로서 강요

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증언은 많은 분들로부터 들어와 있고, 그 사실은 떠올릴

때마다 저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올해(04) 5월에 발행한 『소록도 갱생원 강제수용환자의 피해사실과 그 책임소재』

(인권도서관ㆍ히로시마  문고) 에 머리말에도 썼습니다만, 변호사인 미나미 노리오(南典男)씨가

“일본에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중략) 일본인들은 중국이나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오히려 깊어지기만 하고 아물 일은 없을 것 같은

상처를 입은 사실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가 결정적으로 부족하다. (『법률시보』2004 1월호,

특집 「전후보상 문제의 현황과 전망」)라고 쓰셨습니다만, 소록도 재판에 즈음해서 이 논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일본에서는 모두가 자국일국주의<自国一国主義>입니다. 이번 검

증회의에서도 일본국내 시설 13곳의 피해실태 조사를 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구 식민지에 대한 피해실태 조사와 같은 것은 그저 덤으로 덧붙인 것뿐입니다. 단종수술은 증언에 따르면 대만의 낙생원<楽生園>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만, 전혀 보고서에는 올라와 있지는 않습니다. 검증회의ㆍ검토회 위원들이 구 식민지 조사를 정식으로 실시했다고는 못 들었습니다. 로 코우

바이(魯紅梅)씨에게 언제 소록도에 가셨나고 묻자, 소록도 현장에는 아직 못 갔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일본국내 소재 13곳 시설의 피해상황은 국가배상재판 시에 아주 상세하게 조사했습니다. 검증회의에서도 더욱 꼼꼼히 살피자고 지금 일본국내 시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조사내용으로는 불인수술ㆍ인공임신중절(낙태)도 나옵니다. 거기에는 인공 내지는 자연유산

된 태아를 포르말린에 담근 물건이 있다라는 내용이 쓰여져 있어서 5곳의 요양소에서 그 사실

이 판명되었다고 써 있습니다. 어제(04 6 27) 열린 회의에서 없다고 되어 있었다과거에는 있었던 듯하다라고 조사에 올라와 있던 타마 젠세이엔(多摩全生園)에서 36구에 달하는 태아가 포르말린에 담겨 있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P109

 이러한 예를 한 가지만 들어도 이 한센병문제 검증회의가 진정 사실에 의거해 조사를 할 수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듭니다.

 90년만의 진상」이라 불리며, 그 기나긴 일본국내와 구 식민지 피해의 진상규명과 재발방

지 방침이 2002 10월부터 시작되어, 2005 3월까지라는 짧은 기간으로 과연 이 멤버로

가능할 것인가?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마음으로 회의를 방청했답니다.

 본년도(04) 말에는 검증회의는 일단 해산하겠으나, 3가지 기둥을 앞세워 로드맵위원회라는

것을 설립시킬 모양입니다. 과연 기나긴 이 나라의 오류, 즉 라이(나명)예방법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우생보호법, 구 식민지하의 더욱 과혹한 한센병 정책의 실태에 대해 아무런 손도

못 쓴 채, 검증회의에서 방침이 나올 것인가?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생사상을 보급ㆍ선전한 일본국가의 책임

 

편집부 : 의견서에서는, 우생보호법 시행규칙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계시네요?

타키오 : 우생보호법 시행규칙 17조에서 조산부ㆍ보건부ㆍ간호사는 우생보호법 및 약사법의

해설 혹은 인공임신중절의 현황과 모체에 미치는 영향 40시간 이상의 인정강좌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48년 이후 약 50년 동안이나 매년 간호직 종사자를 모아, 우생

보호법에 대한 강좌를 가졌던 것이죠. 라이(나병)항목 이외에도 유전성 정신질환이나 간질

등도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만, 이들도 포함해서 사람이 살아갈 권리를 부정하는 사상을

선전 보급해 나갔습니다. 이에 대한 일본국가의 책임은 크다고 봅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에 아쿠다가와 류우노수케<芥川龍之助>가 지은 『캅빠(河童, 가상상의 요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만, 캅빠의 아버지가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냐?고 묻자, 그 아기는 억지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다고 답해 그대로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것인가 태어나지 않을 것인가란 자기결정을 아기에게 묻는다는 지금부터 80년쯤(1927) 전에 나온 소설입니다. 우생사상이라는 것은 태아(태어나야 할 사람)의 의지 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나도 기르기가 힘들겠네란 이유만으로 태어나지 못 하도록 한다. 장애인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만들고 있는 우리 사회가 더욱 문제가 되겠죠. 한센병에 걸리는 것 자체는 본인의 책임은 아닙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죠. 저도 허리가 아파서 계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동경에도 오오사카에도 지하철에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없습니다. 짐을 든 늙은이에게는 아주 벅찹니다. 사회가 저희를 하여금

P110

살기 힘들게 해 놓고, 살기 힘든 사람은 필요없다라는 논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회를 만든 것은 인간입니다. 그 사회에 적용되지 않은 것이나 한센병이나 정신적 장애를 안

고 태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존재할 것이 용납 안 된다는 일이 나중에

제도화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야기될 문제점을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로만 하는 것으로는 재발방지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시점에서 과거를 생각해 미래를 향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무엇보

다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해서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한센병 소록도후생원 보상청구 소송 시작된다.

 

타키오 : 소록도에서는 작년(03) 12 17일에 보상법을 청구해, 올해 2월과 3월에 추가로

청구한 117명 가운데 이미 6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2월에 열린 내각회의 후에 가

진 기자회견에서 사카구치 치카라<坂口力>후생노동성 장관은 3월 중에는 내겠지만, 그리 급할 것도 아니지라고 말했었습니다. 제가 화가 나는 것은 그 발언도 그렇습니다만, 3월이 벌써 6월이 되었습니다. 몇 번씩이나 전화나 메일을 드리지만, 처음에는 담당자가 국민연금법 심의

때문에 바쁘다고 말하기에 제가 (연금법이)좋던 나쁘던 간에 연금법 심의는 끝난 것이 아니

?고 되묻자 마지막에는 신중심의를 해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6개월이나 지났는데 말이죠. 국내문제를 다루고 있는 사이에 보상신청자인 어르신들은 몇 명이

나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지극히 자국민주의ㆍ일국주의입니다. 동시에 화가 난 것은

국민들이 이에 대해 화내지도 않습니다. 사실을 몰라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2월의 기자회견에

관한 보도를 한 신문사는 동경 마이니치<毎日>신문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신문사들은 이를 묵살했습니다. 그런 태도에 대해 구체적인 항의행동이 일지도 않았습니다. 변호사는 얼른 했으면 한다고 요청했습니다만...

추기 : 본년(04) 8 16일 후생노동성은 일본국외에 소재한 한센병 요양소는 보상법의

대상 밖이다고 해서 보상청구를 기각했습니다. 8 23일에 소록도 후생원 한센병 보상청

구 변호단들은 행정소송을 동경 지방법원에 제기했습니다.

 

 

 

일본정부의 책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타키오 : 일본국내 문제만 어떻게 하면 된다라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

인류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논리가 없는 속에서, 이야기는 조금

옆길로 샙니다만, 이라크에서 구속된 타카토오 나호코(高遠菜穂子)씨 등 3명에게 자기책임론

이라는 추궁이 일어났죠.

P111

정부에 신세를 지면서 정부에게 대들다니 무슨 소리를 하냐라는 국민적 여론이었죠.

 쿠마모토(熊本)현 쿠로카와(黒川) 온천에서 일어난 아이스타 사건을 봐도 알 수 있듯이, 2

동안 쿠마모토현고 알고 지내 왔으나, 쿠마모토현이 부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키쿠치 케우후우엔(菊地恵楓園)의 오오타<太田> 회장님을 비롯, 그곳에 장난 전화나 팩스가 많이 갔다는 사실은 저는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약한 자를 때리지 말아라란 신조로 피차별 부락해방운동을 해 왔습니다. 국가가 솔선해서 약자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정부에게 한마디 하자 나라님께서 백성을 보살펴주고 있는데...라는 목소리가 정부

고위인사의 입에서 나옵니다. 이번 이라크 인질사건에서는 히로시마출신 국회의원으로부터는

“정부에 반대하는 자는 비일본국민인다란 발언도 튀어나왔습니다. 나라가 취하는 행위에 대해

이런 게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건전한 의견인 것입니다. 국민은 국가를 감시할 권리가 있습니

.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며, 국회로 인해 내각총리가 선출됩니다. 사법기관도 그렇고 최고

법원의 판사를 심사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국민은 주인공일 테죠. 그 주인공이 자신의 의

견을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 의견들이 다른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신숙옥(しんすご

辛淑玉) 씨가 NHK방송의 체조 프로그램은 젊은 여성만 출연시키고 있다, 노인이나 남자나

장애인은 어째서 출연하지 않는건가? 라고 말하고 있으나 NHK와 같은 획일주의가 당연하다고

간주되어, 그에 대해 당연하지 않다는 의견에 오히려 비판이 몰립니다. 이런 논리가 이번

검증회의의 경과에도 나타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종교계도 법조계도 학교도 여러 문제는 있겠지만, 그 전에 일본정부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라이(나병)예방법이 1996 3월에 폐지되기 전까지는 학습지도요강 내지는

교과서에서 라이(나병)예방법을 가르쳐 왔고, 우생보호법 제 3 3, 14조 제 1 3호에

의거해 인공임신중절이 시술되었었고, 9년 전까지만 해도 40수년에 걸쳐 보건부나 조산부에게

강습도 해 온 거니까요. 이는 일본정부의 책임이며, 이를 이행한 지자체의 문제이겠죠. 그런

책임소재를 건너뛰고 간호사나 의사 책임만을 추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선 일본정부의

책임이 근본에 있고 그 다음의 문제이죠. 물론 그를 바로잡을 수 없었던 국민의 책임도 있습니

다만...

 검증회의는 그러한 추궁을 건너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라이(나병)예방법 재검토회

정부위원이었던 이와오 소우이치로우<岩尾總一朗>에게 사정청취조사도 해야 하지 않을까? 쿠마

마토 지방법원에서는 그 당시의 후생성의 담당과장이었던 이와오는 일본정부=피고 쪽이 원고

보다 옳았다.는 소리까지 하던 인물입니다. 그 이와오는 지금도 후생노동성 의정국장으로

있습니다.

 

 

P112

무시된 돗토리사건

 

 오오타니 후지오<大谷藤郎>라는 사람은 후생성 담당과장 자리에 있었을 때, 일본 국내 13

시설의 설비를 개선시켰으므로 라이(나병)예방법 폐지의 시기를 늦춘 것은 할 수 없었다.

말씀하셨으나 조건보장된 것은 어디까지나 13곳 시설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센병 요양소 입소경험이 없이 어머니를 돌보던 T씨와 같은 사건(돗토리 사건)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돗토리현 중부에 살던 T씨의 어머니가 한센병에 걸렸으나 요양소에 입소하지 않은 채로

오오사카까지 나와서 통원치료를 받다가 빈곤과 어머니의 치료비 때문에 집까지 팔았습니다.

T씨의 어머니는 자신이 가진 예금통장을 보이며 이 통장의 잔고가 없어지면 요도가와(淀川)

몸을 던져 죽을 뿐이야.라고까지 말해 울었다고 합니다. 13곳 시설만 개선했다는 말은 도리어

보면 요양소에 입소하지 않는 한센병 환자나 그들의 가족을 배제하겠다는 논리입니다. 그 점을

힘을 기울여 문제로 제기한 이가 T씨이며 아무리 호소해도, 어디에 호소해도 아무도,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가시마 아이세이원<長島愛生園>까지 갔습니다. 한센병 국배소송 변호단과도 만났습니다. 돗토리현에도 오오사카부에도 갔습니다. 그런 끝에 어머니에게 대한 행정처리에는 잘못이 없었다.란 말을 듣고 최종적으로는 세상에도 알리자고 결심해 돗토리현 한센병 담당직원을 베었던 것입니다. 돗토리 지방 법원에서는 공판 1회의 즉결 심판으로 징역 4년 유죄판결이 나왔습니다. 지금 항소심에서 심리 중입니다. 고등법원 단계에서는 드물게 3번의 공판이 열려 다음 7 26일에 판결이 있습니다. ()

 검증회의 좌장인 카네히라<金平> 씨에게 이 사건을 제기했습니다만, 카네히라 씨의 대답은 현재 형사재판이 계속 중인 사건이란 점이나 사생활 보호 문제 등이 있으므로, 검증회의가 사건내용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라는 것이

었습니다. 형사사건이라면 후지모토<藤本>사건 (쿠마코토현 키쿠치군 소재 한센병 환자인 후지

모토 마츠오<藤本松夫>씨가 상해ㆍ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간주되어 전국 한센병 환자 협의회 등

에 의한 구원활동에도 불구, 1962년에 사형 집행된 사건) 은 원죄이긴 합니다만 형사사건이며,

개인정보 보호 문제도 있습니다. 이 돗토리사건은 비교적 가벼운 사건이므로, 아마 항소심에서

끝날 것입니다. 피해상황에 대해선 사생활이므로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검증회의의 보고서를 보는 한에서는 요양소를 퇴소하신 분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퇴소자나

비입소자나 그 가족ㆍ유족에 대한 조사는 없습니다. 조사는 시설에 대해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진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7 26일 히로시마 고등법원 마츠에<松江>지부에서 열린 항소심 판결에서, T씨는 징역  

3년의 실형 판결을 받아 형은 확정되었다.

 

 

P113

쿠마모토<熊本> 현과 한센병

 

편집부 : 쿠로카와<黒川> 온천 차별사건에 대해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차별한 당사자

에게 비판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쿠마모토현이 어째서 미리 전달을 하지 않았을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라는 것으로 끝난 사실을 놓고 타키오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타키오 : 지당하십니다. 쿠마모토현의 홈페이지를 보면 전 한센병 환자분들의 여행은 쿠마모토

현이 후루사토(고향)사업으로서 실시하고 있는 행사입니다. 한센병 차별을 없애는 것을 목표

로 한 사업으로서 18명의 쿠마모토 키쿠치 케이후우엔<菊池恵楓園> 입소자의 숙박을 쿠로카와

온천 아이레디스 궁전 쿠로카와 온천 호텔<アイレディス宮殿黒川温泉ホテル>에 의뢰를 한 것입 니다. 쿠로카와 온천에는 그 밖에도 여관은 있을 텐데 말이죠.

 전 부분(P104,105)에서도 언급했듯이 쿠마모토현은 아직까지도 6 25일을 중심으로 한셍병

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주행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쇼우와 천황이 1930년에 쿠마모토, 1935

에 카고시마<鹿児島>와 미야자키<宮崎>에서 열린 대연습에 오는 것입니다만, 그가 오기 직전

에 카고시마에 소재한 호시즈카 케이아이엔<星塚敬愛園>에서는 50수명의 한센병 환자를 강제

수용, 이를 차별용어로 나병 사냥이라 합니다만, 그런 짓을 했습니다. 천황이나 황족이 방문할

시에는 전국에서 한센병 환자를 배제ㆍ격리시키고 있습니다. 1930년의 쿠마모토의 경우도

매한가지로 한셍병 환자는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정신장애인을 배제한다는 것은 지금도

하는 짓이지만... 토우후우<藤楓>협회 그 자체가 황족을 상징하는 문양을 각각의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도 타카마츠노미야<高松宮>한센병 자료관이 존재하며, 황족을 칭송하

는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황태후 사다코<節子>는 매년 구 식민지를 포함한 전 요양소장을

오오미야어소<大宮御所>에 소집, 격려하여 절대격리를 장려함으로써, 요양소 이외의 학자나

P114

연구자가 의견을 나타낼 수 없도록 상황을 조성해 버렸습니다. 「세 원장 증언<三園長証言>

(1951, 나병 예방법개정을 의논하는 제12회 참의원(상원) 후생위원회에서의 미츠다 켄수케

<光田健輔>ㆍ나가시마아이세이엔<長島愛生園> 원장, 하야시 요시노부<林芳信>ㆍ타마젠세이엔

<多摩全生園> 원장, 미야자키 마츠키<宮崎松記>ㆍ키쿠치케우후우엔<菊池恵楓園> 원장들의 발언. 한센병 환자 격리와 징계검속 규정 강화를 요구한 발언이 1953년 공포된 나병 예방법

에 채용된다.) 속에서, 미츠다와 같은 경우는 황태후는 예방에 힘을 써 주셔서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천황이나 황족이 한센병 환자 배제나 차별에

다한 역할은 아주 큽니다. 그 사실을 헤아려 하지 않는 쿠마모토현이 실시하는 계몽이란

엉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저는 구 식민지지배의 더 한가지의 문제로서 한우의 문제, 즉 군에 대한 피혁이나 식육

을 연구하려고 해서 자료를 수집하러 쿠마모토 현립도서관에 갔었습니다. 그곳 도서관에 한센병에 관한 자료도 많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소장하는 쿠마모토 지방법원의 재판자료

를 쿠마모토 현립도서관 측에 기증제공하려 하자, 불필요하다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쿠마모토현이 진정으로 쿠마모토 지방법원 판결 이후 한센병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올바르게 현민들에게 이해시키는 방침이 채택되어 있는가에 대해 의심스럽게 느꼈습니다.

 그 익년도 쿠마모토현에 갔습니다만, 6 25일을 중심으로 후생노동성과 사회복지단체협회가 제작한 한센병 이해에 관한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쿠마모토 지방법원이 소재하는 곳인 만큼 쿠마모토현만이라도 5 11일 전후에 한센병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주

행사를 하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했으나, 이루어지기는 아주 절망적입니다. 돗토리현의

한센병을 담당하는 과에 갔을 시에 11월이 되도록 그 문제의 포스터가 2장 붙어 있었습니다.

돗토리(카타야마 요시히로<片山義博>지사) 도 쿠마모토(시오타니 요시코<潮谷義子>지사)

한센병문제에 대해서는 선진적인 지자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돗토리사건이 발생

하고 쿠로카와 온천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상징적입니다.

 저는 입욕이라는 것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씁니다.

 제가 요양소에서 입소자와 함께 입욕을 했을 적에 우선 의족을 벗고, 구식 욕조에서는 더운

물과 물을 섞어서 온도를 조절합니다. 이 물이 뜨거우면 말초신경이 기능하지 못 하신 환자분

께서는 뜨겁다고 느끼지 못 하실 경우가 있어, 화상을 입으실 우려가 있습니다. 외상이나 상처

는 곪습니다. 그런 일에 매우 신경을 쓰고 계시는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한 가지는 지금까지도 입욕을 둘러싼 차별사건은 수차례 발생했습니다. 예컨대 나가시마

아이세이엔<長島愛生園> 에서는 온천에 들어가려 해서 거부당했고, 오오시마 세이쇼우엔

<大島青松園> 에서는 공중목욕탕에 들어갈 것을 거부당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나가시마에서는

건너편에 있는 세탁소에 부탁했더니 자신은 차별의식은 없으나, 세탁을 부탁하는 다른 고객이

차별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거절당한 예도 있습니다.

P115

부락차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의외로 가까운 사람이 차별을 잘 알고 있기에 차별을 하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교사로서 몇 해 지내 봤습니다만, 수학여행을 갈 때도 사전에 조사는 합니다.

이번은 특히 장애를 안고 계시는 어르신이라 발이 미끄러워지지 않나, 뜨거운 물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이 동시에 묵게 될 것인가, 그 사람들에게는 한센병 계몽은 제대로 이루어

져 있는가 그런 점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락문제의 계발ㆍ

계몽은 1960년 동화대책심의회 답신에도 거론되었었습니다만, 40년 지난 지금 현재, 과연

부락차별은 없어졌을까요? 주택이나 지역 환경과 같은 부분은 개선되었다 해도, 결혼이나 취직

에는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직까지도 많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사는 지자체 외의 사람과 결혼할 경우, 원자폭

탄의 증상이 2세에 유전할까라던가 부모는 피폭자가 아닌가 해서 몰래 조사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쿠마모토 니치니치<熊本日日> 신문에 하라다 마사즈미<原田正純> (전 쿠마모토

대학교 의대 교관, 현 쿠마모토 가쿠엔<学園> 대학교 교관) 가 썼습니다만, 미나마타에서도 30

, 40년이 지나도 불식하지 못 하는 차별이 남아 있다고. 인간사회의 차별은 그리 쉽사리 없어지

지 않습니다. 요즘 들어 지인에게 나가시마 아이세이엔<長島愛生園> 에 간다고 하면 괜찮나?

라던가 『코지마노 하루<小島の春>』를 읽었는데, 그 책은 훌륭해.라는 소리를 합니다. 그를 생각하면 1, 2년의 계몽으로 사람이 싹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닐까요? 여성차별도 매한가지입니다. 장애인 차별도 그렇고요. 여태까지 약자가 얼마나 짓밟혔 왔는지, 얼마나 차별이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할 때, 한센병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키쿠치 케이후우엔<菊池恵楓園> 이 있고, 사립시설도 있고, 일찍이 혼묘우지<本妙寺>

있었다는 쿠마모토현입니다. 전후도 쿠로카미<黒髪>초등학교문제가 일어나, 쿠마모토현

야츠시로<八代>군 사카모토<坂本>쵸우 (합병 전의 촌명은 시모마츠쿠마<下松求麻> )에서

재택 한센병 환자를 그 아들이 살해라고 자신도 자살한다는 슬픈 동반자살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그 마을에 저도 다녀왔습니다. 그 집은 이미 없어지고 묘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선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행정적 조치는 전혀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타키오 지음『근대 일본의 한센병과 아이들ㆍ고』<인권도서관ㆍ히로시마

세이큐우문고>참조) 쿠로카미 초등학교문제(5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 저서를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만, 미감염 아동이라고 차별적으로 불린 아이들이 취학을 거절당한 사건입니다.

‘한센병곤 무균상태의 아이들이라 감염되지 않다. 나병 예방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란 형태로

입학운동이 벌어집니다. 그 속에 조선인의 아이들이 3명이 있었고 그 아이들은 애초 초등학교

입학조차 거부당했었습니다. 어째서 배제되었는지에 대해선 문제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흔히들

하듯이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옮지 않아요. 이제는 쉽게 낫습니다.라는 뻔한 계몽으로는

진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P116

 더 한 가지 아이들 문제에 관해 호시즈카 케이아이엔<星塚敬愛園> 에서는 결혼시의 단종수술

에 대해 나가시마 아이세이엔<長島愛生園>과 완전히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키쿠치 케이후

우엔<菊池恵楓園>은 카와무라<河村正之>라는 인도박애 주의자인 원장도 있었고 당초는 결혼시

에 꼭 단종수술을 실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입소자들이)아기를 가진 단계에서는 문제도 발생하

, 아이들을 처리하거나 태어난 아기를 요양소 밖으로 데려간 적은 있었으나, 미츠다 켄수케와

같은 방식으로 대를 끊는다는 일은 없었습니다. 미츠다는 「세 원장 증언」속에서, 장래적으로

나아가서는 한센병과 관련된 가족에게까지 단종수술을 권하겠다는 소리까지 하고 있습니다.

미츠다는 호랑이가 변해서 고양이가 된다고까지 썼습니다만, 단종 수술에는 입소자들을 얌전하게 하고, 도망을 방지한다는 지금 말하는 치안유지와 같은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천주교

계통 시설에서는 결혼을 축복한 예도 있습니다. 아마미 와코우엔<奄美和光園>에서도 오오니시

<大西>씨라는 천주교 신도가 원장이었을 적은 아이는 낳게 하되,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

는 수녀에게 맡겼습니다. 모든 요양소가 미츠다의 논리로 운영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호시즈카 세이아이엔<星塚敬愛園>에서는 미츠다의 무릎제자이며 초대 원장인 하야시 후미오

<林文雄>가 미츠다의 논리를 충실하게 지켰다는 사실 만큼은 기억해 주십시오.

 

편집부 : 쿠로카와온천 차별사건을 일으킨 호텔은 동경에 본사가 있는 아이스타라는 화장품

회사라고 하더군요.

타키오 : . 다소 우익적인 성향을 띤 회사라고 하네요. 그런 호텔에 투숙할 것이라면 적어도

호텔 측 간부에게 이런 취지로 가겠다는 이야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 개개인의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사업의 일환으로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실시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계몽이 충분치 않다, 호텔 측은 어떤 계몽을 하고 있는가, 시설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미끄러

지거나 화상을 입을 우려는 없는가 등 사전에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의족을

달거나 살갗에 망울이 있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눈이 안 좋다는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지금 현재도 엄연히 남아 있는 것이라 호텔 측에서 사전준비를

하지 않고 투숙 직전인 11월이 되자 갑자기 투숙객이 케이후우엔<恵楓園> 입소자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제대로 된 인식이 없다면 당황하겠죠. 이런 태도는 입소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다른 투숙객이 기피하게 되면 장사를 못 해먹겠다는 자본주의의 논리 그 자체입니다. 온천협회가

이 호텔을 제명하겠다는 방향으로 끝이 났으나, 비판을 받아야 마땅한 쪽이 오히려 규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쿠마모토현은 9월 이후의 활동 속에서 비판을 받아야 했던 대상인 것입니다. 케이후우엔<恵楓園>의 기관지인 『키쿠치노<菊池野>1월호를 보면 말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

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류와 이해사업의 일환입니다라는 것 자체가 차별이라

는 것이 됩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P117

 이러한 문제는 한센병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장애인 차별, 조선인차별ㆍ민족차별

, 부락차별이 겹쳐진 차별구조가 현실적으로 존재합니다. 부락은 한센병 증세가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들 합니다. 감염되어도 영양상태가 좋으면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도 있다 보니, 영양

섭취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 빈곤상황에 있는 부락이나 구 식민지에서 발병률이 높다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한 구조적인 차별 속에서 이 문제가 발생한 것이므로,

하라다 마사즈미<原田正純>씨가 말씀하듯이 3, 40년 지나도 의식은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란

생각이 원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쿠로카와온천 차별사건에선 쿠마모토현은 스스로의 과제로서

지금까지 어땠을까란 점도 고려하지 않은 채 쿠마모토현에게도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내용을 담은 책을 쿠마모토현내 배포를 취소하고 있습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금년(04)

6월에 사회복지법인 후레아이 복지협회(동경)가 한센병 계몽책자로서 아오모리현에 있는 국립

요양소 마츠오카 호요우엔<松丘保養園>의 후쿠니시<福西征子>원장이 우리 요양소에서는 투숙

하게 될 호텔과 절충을 거듭해 양해를 구하고 있다. 그렇게 일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을 게재했더니, 쿠마모토현은 이를 본 사람들이 쿠마모토현의 일처리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도 오해할 수 있다고 반발해 그 책자를 배포하지 않았습니다.

키쿠치 케이후우엔<菊池恵楓園>에 대한 차별공격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쿠마모토현이 향후 계몽활동을 어떻게 해 나갈 것이냐에 대한 방침이 서지 않았습니다. 운동을

하는 측도 쿠마모토현에 비판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습니다. 운동 측이 쿠마모토현을 옹호하

지 않을 수 없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일본정부에게 직접적인 비판을 할 수 없는

검증회의도 이와 같은 구조입니다.

 

 

투쟁은 자력자투로 비롯된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문제점이 잇따라 누설된 채 불과 2년 남짓 되는 기간에 오래토록 발생한

피해를 놓고 다기에 걸친 검증과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란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체적으론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제3자 기관에 떠넘겨 인사문제나 방법에는 끼어들던 일본정부

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제가 이런 책 (『소록도후생원 강제수용환자의 피해사실과

그 책임소재』, 8 6일에는 조선어 번역판을 발행해 한국에서의 운동에 활용되고 있다)을 내

는 일 또한 진상규명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려도 민간의 힘으로 진상

규명을 하는 길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 『츠부테<飛礫>』원고도 진상규명를 위한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자료들을 결집하고 하나로 모아 가는 운동이야말로, 진상규명이 실속 있는 것으로

되어 가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일본정부나 지자체가 같은 과오를 저지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흐름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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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증회의는 내년(05) 8월에 최종보고를 작성하고 인쇄 작업에 들어갈 듯합니다. 그래서 내년

도는 제2차 로드맵위원회가 발족할 것이라고 합니다만,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을지. 저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검증회의의 최종보고가 향후 후생노동성의 정책이나

지자체 계몽 등에 영향을 끼칠 것을 생각하니 검증회의가 진지하게 임했으면 합니다.

 역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진상을 규명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 명이라도 좋으니

까 우선 시작하고 몇 명으로 늘어나면 좋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

, 한 사람의 주체로부터 그 폭을 넓혀 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자신에게 일어날 수도 있

는 문제는 자신들의 손으로 투쟁을 벌여 범위를 넓혀 간다, 다른 힘을 빌리지 않고 우선 시작

한다. 운동에 임하는 사람의 주체가 중요한 것이며 인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록도 소송이 시작된 것을 두고 어떤 저명한 일본 한센병문제 운동가가 저에게 타키오 씨,

단 한 사람의 10년의 집념이 역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네요.라고 말해 주었고, 어제 만난 사람

도 그러한 뜻이 담긴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제 한 사람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10년 전부

터 시작해서 차츰 벗이 생겨 널리 펴져간 성과가 더더욱 앞으로도 투쟁으로 발전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젊었을 때,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니꼴라이 오스뜨로포스키 지음) 라는 책을 읽고

“죽음의 문턱에 서서 자신의 일생은 좋았다, 인류해방의 한 사업을 해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식이 사라졌으면 좋겠다와 같은 말을 난외에 낙서한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

. 늘 저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신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일을 합니다. 고통스러

워도 인류해방 사업이라고 생각하면 즐겁습니다. 사람은 모두 생김새가 다르듯이 의견도 다른

것입니다.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인연을 끊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립해서 싸운 끝에

관계에 끝이 나도 괜찮지만 다음에 또 만날 때 그 사람이 하려고 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면

함께 하면 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滝尾 英二

(타키오 에이지)

[ 이는 2004 6 28, 코우베<神戸>에서 인터뷰한 내용에 가필, 수정을 가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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